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임스 A. 가필드 (문단 편집) === 대통령 출마 === 이후 18년간 오하이오의 연방 하원의원을 역임했고 1880년 연방 상원의원으로 당선되는 등[* 상원의원 임기 시작 전 대통령이 되어 상원의원직을 수행하지는 않았다.] 출세가도를 달렸다. 앤드루 존슨 대통령의 남부 주 복권 시도에 반대하지 않고 존슨 탄핵을 반대하는 연설을 하는 등 급진파외 서서히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으며, 공화당의 하원 원내대표 역할을 하기도 했다. 1880년, 상원의원에 당선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36개 주 예비선거에서 승리하여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. 1880년의 선거는 민주당과의 쟁점이 관세 외에는 큰 차이가 없었고, 인신공격도 그다지 없기는 했지만 선거 자체는 치열했는데, 가필드가 자금이 부족했다. 그래서 가필드는 공화당 내 최대파벌 영수였던 로스코 콩글링과 교섭하여 콩클링 파벌[*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Stalwarts_(politics)|강건파]]라고도 한다. 공무원 개혁을 주장하는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Half-Breeds_(politics)|혼혈파]]와 대립했다.]의 사람들에게 한 자리씩 준다는 조건으로 자금 지원을 받았다. 그 대신 콩클링은 자기 계파 사람인 [[체스터 A. 아서]]를 [[미국 부통령|부통령]] 후보로 내세웠다. 선거 결과 역시 초박빙이었다. 4,446,158 대 4,444,260 민주당 후보 윈필드 스콧 핸콕과와 표차는 딱 '''1,898표(0.02%)'''. 오늘날에 이 표차 나오면 바로 '''재검표''' 요구에 '''부정선거''' 논란까지 벌어질 표차다. 더구나 당시 유권자는 여성의 참정권 부재와 선거 연령 등 선거권이 제약되어 있어 단 921만명에 불과했다. 결국 가필드는 콩클링의 지원을 받은 [[뉴욕 주]]에서 '''2만 3000여표'''차로 앞선 덕분에 선거인단 35명을 차지해서 당선될 수 있었다. 선거인단 수로는 '''214대 155'''. 뉴욕 주 '''35명'''이 민주당 쪽으로 갔으면 '''189대 190'''으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될 표였다.[* 이렇게 "공약차는 별로 없는데 투표는 아슬아슬한" 경우는 1876년 [[러더퍼드 헤이스]] 당선 때부터 1896년 [[윌리엄 매킨리]] 당선까지 한동안 계속되었던 시대적 흐름이었다. 득표에서 지고 선거인단에서 승리한 대통령이 두번, 군소당 후보의 존재만으로 뒤집힌 선거도 한둘이 아니었다.] 어쨌거나 당선되는 데는 성공하고 이후 1881년 3월 대통령에 취임했다. 미국 역사상 '''현직 하원의원'''이 대통령에 당선된 경우는 가필드가 최초이자 유일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